헤세를 다시 만난 날 - 나는 누구의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어떤 책은 두 번 읽힙니다.처음 읽을 때와 전혀 다른 책으로.헤르만 헤세를 처음 손에 든 건 이십 대였습니다. 그 때는 그냥 유명한 성장소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문장은 아름다웠지만, 내 이야기라는 느낌은 없었습니다. 책장을 덮고 나서 오래 기억하지 않았습니다.그 책이 다시 찾아온 건, 십여 년이 지난 뒤였습니다.전공과 관련된 일을 시작했고 그것은 익숙하게 할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그렇게 16년이 흘렀습니다.어느 날 출근길이었습니다. 그냥 평소와 같은 아침이었는데, 이상하게 발이 무거웠습니다. 나름 열심히 살고 있는 것 같은데,그런데 뭔가 이 일이 내 일이 아닌 것 같다는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계속 되었습니다.그 무렵 우연히 다시 펼친 『데미안』에서 이 문장을 만났습니다."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읽는 순간 멈췄습니다.이십 대에 읽었을 때는 그냥 멋진 문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습니다. 그 문장이 나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나는 지금 알 안에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그 알이,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그냥 그 안에 있었던 건 아닐까.헤세의 세 작품은 각기 다른 이야기지만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집니다.『수레바퀴 아래서』의 한스는 성실했습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했고, 어른들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해냈습니다. 헤세는 그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이 문장 앞에서 오래 머물렀습니다.열심히 사는 것과,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 그게 같은 말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게 다른 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돌이켜보면, 내가 '선택'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선택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일을 해야했고, 안정이 필요했고, 그 모든 것이 쌓여서 하나의 삶이 되었는데,막상 그 삶의 출발점에 내가 있었는지, 한 번도 제대로 물어본 적이 없었습니다.그리고 그 질문은, 헤세의 또 다른 작품으로 조용히 이어졌습니다.『데미안』의 싱클레어는 두 세계 사이에서 흔들립니다.익숙하고 안전한 세계와, 낯설고 불편한 세계. 그는 오랫동안 익숙한 쪽에 머물려 하지만결국 그 경계를 넘어섭니다.마음 한구석에서 자꾸 고개를 드는 불편함. 이유 없이 다른 방향을 향하는 시선. 헤세는 그것을 '문제'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알을 깨려는 움직임입니다.그 불편함을 외면하지 않기로 했을 때, 저는 처음으로 다른 방향을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사람과 함께하는 일. 누군가의 방향을 함께 찾는 일. 그게 코칭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았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냥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었고, 그 감각을 따라갔습니다.하지만 방향을 발견했다고 해서 삶이 저절로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처음 교육 현장에 섰던 날이 있었습니다.자신의 방향을 찾지 못해 막막해하는 청년들과 함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들을 바라보며 문득 깨달았습니다. 내가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던 질문이, 누군가에게도 같은 질문일 수 있다는 것을.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잘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아, 나는 지금 내 삶을 살고 있구나. 그 감각 때문이었습니다.싯다르타는 말합니다."지혜는 전달될 수 없고, 깨달음은 각자의 몫이다."오래 알고 있던 문장인데, 어느 날 다르게 읽혔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정답을 찾으려 했습니다. 더 나은 방향, 확실한 선택, 틀리지 않는 삶. 그런데 싯다르타가 결국 발견하는 것은삶은 이해하는 게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헤세의 세 주인공은 모두 다른 길을 걷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결국 마주하는 질문은 하나입니다.나는 누구의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는가.지금 당신 안에서 조용히 고개를 드는 불편함이 있다면그것이 지금의 삶을 부정하는 신호인지, 아직 살아보지 않은 삶이 보내는 신호인지, 잠시 들여다봐도 좋겠습니다.
2026-03-31 이현주 코치